나래의 하느님

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신다지만, 아니 그 사실을 여타 수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고히 믿지만, 여태껏 살아온 날들 위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딱 한 마디로 요약된다.
- 어색해.
어색하고 낯설고 뻘쭘하다. 하느님이 내 눈앞에 비현실적으로 생생하게 (모순적 묘사지만 달리 설명을 못 하겠다) 나타나신 그 순간 이후 모든 게 그랬다.
지금 이 글을 시작하고 써 내려가면서 몇 번이나 ‘신앙생활’이라는 낱말을 썼다 지웠다 한다. ‘신앙’이라는 두 글자를 자판으로 조합해 나갈 때부터 손이 느려진다. 이 무슨 나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인가. 자음 하나 입력하고, 깜빡이는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삭제한다. 그러는 동안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털실 뭉치처럼 헝클어지며 똬리를 튼다.
- 이봐, 너는 이른바 ‘신앙인’이야. 하지만 말은 말일 뿐이라고. 뭘 그렇게 몸을 비비 꼬면서 불편해하고 그래?
자신을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다. 편치 않은데 편해야 할 것만 같다.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눈을 빛내며 “저의 신앙생활은…”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께가 무거워진다.
어쩌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평생을 코웃음 치며 비웃어오던 ‘종교적 형태의 하느님’을 내 눈앞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다. 그런 기적에 과연 내가 합당한 인간이었을까? 물론 그분이 다 알아서 하신 일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 순간 일말의 의심도 없이 전부 믿은 나였으니 합당하달 수도 있겠지만.
무한한 기쁨.
그만큼 무한한 의문.
충족되지 않는 질문들을 안은 채 그분에 대한 믿음 하나로 무작정 ‘제도권 종교 체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하느님 없이 살던 시간 동안 커져 버린 머리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마치 누가 꼬집으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아야!’ 소리처럼 툭툭 추임새가 들어갔다.
- 말이 안 되잖아요.
- 그걸 누가 믿겠어요.
- 앞뒤가 안 맞는데요?
글쎄, 내가 그렇게 논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나? ‘말이 되는 말’이란 대체 뭘까? 누구든 다 믿는 무언가가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나? ‘앞뒤’는 또 뭔데? 모순을 말하는 건가?
만일 누가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내 말과 행동에서 그 모두를 포착한다면, 단 하루만으로도 기나긴 목록을 쓸 텐데 말이다. 얼마나 뒤죽박죽 궤변과 비논리를 내뱉고 있는지가 가득 적혀있겠지. 하지만 이런 자기반성은 이내 뒤집히고 만다.
- 나는 미약한 인간이라서 그렇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며? 당연히 완벽해야지!
자신이 떠올린 반론에 심취한 듯 뇌 회로는 열심히 돌아간다. 딴에는 ‘완벽’에 어울리는 덕목을 더없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 수준에서 더해간다.
그분의 말은 최고의 석학을 다 무찌를 만큼 귀납적 연역적…그게 뭐든지 간에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건·사고의 알파와 오메가를 찜찜함 없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진영에 상관없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을 갖췄음은 물론이다. 그 어떤 갈등의 장소에서도 한마디만 하시면 즉시 상황이 정리된다.
무슨 예가 있으려나.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 남자 대 여자? 이슬람 극단주의자 대 기독교 근본주의자? 내친김에 나는 판문점 한가운데 상공에 둥둥 떠 눈이 멀듯 한 후광을 발하시는 그분을 떠올려본다. 양쪽에 늘어선 이들에게 조곤조곤 무언가를 설명하시는 하느님.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감에 넋을 잃은 이들은 거룩한 설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주섬주섬 무장을 해제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포옹한다…는 장면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안타깝게도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상황에서도 잔뜩 의심을 품은 눈초리로 서로를 노려볼 듯하다. 그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달까.
하느님은 인간이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꿰뚫은 채 지극히 쉬운 표현으로 설득하신다. 그래도 잔뜩 굳은 마음에 호불호라는 찌꺼기까지 덧칠된 마음은 무엇이든 튕겨내고 만다.
결국 인간이 문제인가? 라는 의문에 멈칫한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 바로 그게 문제라고요 하느님. 왜 모두가 찍소리 못할 만큼 강력하고 압도적인 설득을 하지 못하세요?
- 인간의 마음이 죄로 굳어졌다 한들, 그 정도는 단번에 깨실 수 있지 않나요?
- 안 하시는 건가요, 못 하시는 건가요? 못 하실 리가 없는데도 가만히 계시니까 사람들이 믿질 않잖아요.
스스로 깐 멍석 위에서 나는 그렇게 맹렬히 하느님을 판단한다. 판단하는 줄도 모르고 판단하고, 만드는 줄도 모르고 내 입맛에 맞는 하느님 상을 만든다.
- 일단 정치적으로 절대 저쪽은 아니시겠지. 엄청나게 고생하셨으니 뚱뚱하실 리도 없어. 정말 유대인처럼 생기진 않으셨으면 좋겠는데…그렇다고 유럽에서 그려낸 성화에서처럼 파란 눈 백인도 아니었으면 하고…식사는 채소 위주로 드시지 않을까? 타인과 잘 어울리되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지만 다정다감하실 테고. 성경에서도 세심하게 모든 사람을 챙기셨잖아. 측은지심이 있으시달까. 그런데 흔히 말하는 ‘던져진 환경’에 순응하시진 않았던 듯해. 민족이나 이웃, 심지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도 휩쓸리지 않으셨으니까. 나름 돌직구 화법도 쓰시고 말이야.
성경까지 동원한 그 형상은 점점 정교해진다. 수도 없이 되풀이해 왔던 내 반문이 배경음악처럼 뒤에 깔린다.
- 하느님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물음표 안에 담긴 존재는 진짜 그분이 아닌, 내가 만든 하느님이었다. 나는 줄곧 스스로 창조한 그 무엇 안에서 어색해했던 셈이다.
지치지도 않고 조각해 온 가짜 하느님은 오싹하게도 어떤 사람과 몹시 닮아있었다.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
내가 내민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사람.
이 정도는 되어야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사람.
이 정도는 되어야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한 사람.
그분을 만난 이후에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미워해 온 셈이다. 썩 마음에 차지 않는 하느님과, 영원히 못마땅할 나 자신 양쪽을.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상대와는 어색할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결국 하느님에게 따지고 들기보다는 자신과 먼저 화해해야 했다.
하느님은 내 앞에 당신께로 오는 길을 뻥 뚫어놓으면서 한가운데에 아름다운 강을 가로질러 흐르게 했다. 그리고 그 강 위에 작고 예쁜 다리를 걸쳐놓았다. 물살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차갑고 어두운 강바닥만을 상상하며 냅다 도망치고는 했다. 평생 벗어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그곳 건너편에서, 양팔 벌려 환히 웃으며 기다리신다.
- 나래야, 이제 다 괜찮으니 건너오렴.
나는 머뭇댄다. 바로 눈앞에 잔잔하고 눈부신 풍광만이 있는데 내 머릿속의 강은 여전히 축축한 심연이다.
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허상으로 바꾸는 매일이었다. 두려움과 걱정에, 혹은 선입견에 많은 것이 잡아먹혔다.
그 와중에도 몸과 마음은 내내 자라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집어삼킨 그 모든 허상이 ‘진짜’라 생각했다. 두꺼워진 껍데기를 거울로 비춰볼 때마다 항상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모습 어디가 당신의 모상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바깥세상은 팽개쳐두고 내면으로만 침잠하면서, ‘나’를 파고 또 파면서도 정작 아는 건 없었다.
당신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귓가에 맴맴 돌 정도로 듣고 나서야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아등바등 쌓아왔던 ‘나’라는 이미지는 진짜 내가 아니었다. 그토록 흔히 들어왔던 낱말인 ‘에고’에 불과했다는 깨우침까지 몹시 긴 시간이 걸렸다.
에고라는 놈은, 그 안에서 빠져나와 벗겨진 허물이 널브러진 꼴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았었다. 그 순간이 되어서야, 수백 권의 심리학 서적을 탐독하며 지긋지긋할 정도로 접했던 개념이 생생히 다가왔다. 애초에 ‘나는 에고가 강해’, 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았다. ‘나’와 ‘에고’는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로 살거나 에고로 살거나 둘 중 하나다. 에고를 뒤집어씀과 동시에 나는 죽음의 문턱으로 몰리고, 거기서 벗어나는 즉시 허물인 에고는 녹아내리게 된다. 마치 이 구절처럼.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복음서 1장 5절 (공동번역성서)
**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본래의 나는, 아주 작게 몸을 수그린 채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열심히 에고를 만들어왔다. 때로는 죽을 만큼 절망하면서까지 본떠 만들고팠던 대상이 있었다. 그건 또 뭐였을까. 가끔 의식 밑바닥에 찜찜함을 일으키고는 했던, 그 희번덕대던 광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퍼뜩 정신이 들어 손을 멈추며 중얼대던 때가 기억난다.
- 이게 아닌데.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건 아니야.
- 하염없이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지만. 도착할 그곳엔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어.
그런 깨달음이 굳은 마음을 비집으며 들어온 찰나가 분명 있었다. 어쩌면 지금 여기가 내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정답이 손에 잡혔던 때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눈부시게 밝은 그 신기루는 내가 몸을 완전히 돌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마침내 휩쓸려 간 곳의 춤사위는 너무 빨라, 가만히 있으면 휘적대는 다른 팔들에 맞아 다칠 것만 같았다. 왜 추는지도 모르겠고 결코 아름답지도 않아 보였지만 일단은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움직여야 했다. 내 팔이 일으키는 바람은 후더운 주변 공기와 뒤섞여 나를 무겁게 눌러 내렸다.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짜 나’는 돌아볼 새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거기에는 멈출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끝없이 내 주의를 돌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자신이 거대한 힘을 지녔음을 깨닫지 못한 채 철창 안에 걷혀 있는 동물처럼 길들었다. 마취 주사나 약으로 잠재우듯 끊임없이 나를 몽롱하게 하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저항하기는 했던가…? 아마 아닐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주위의 어둠에 익숙해져 스스로 움직여왔으니까. 치열하고 성실히, 마치 가장 가치 있는 일에 매진이라도 하는 양 에고 만들기에 빠져있었다.
내가 숨을 불어넣어 창조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정교해진 에고는 급기야 살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 대신 말하고 나 대신 일 하며 세상 전면에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게 에고가 가장 잘나가던 시절, 작게 웅크린 채 겨우겨우 살아내던 진짜 나는 드디어 모든 걸 놓아버린 채 쓰러지고 말았다. 너는 내가 아니었구나, 하는 중얼거림은 성대조차 울리지 못하고 입술 언저리를 움찔대게만 했다. 섬뜩한 번득거림을 후광처럼 짊어진 에고는, 축 늘어진 나를 향해 한쪽 입가를 살짝 치켜올리며 속삭였다.
- 이게 네가 바란 거 아니었어?
- 아니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전히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자마자 나는 정신을 잃었던 듯하다.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 에고는 사라지고 없었다. 에고를 만들고 다듬는 데만 여념이 없던 나 혼자만 팔을 늘어뜨린 채 숨죽이고 있었다. 한없이 조그맣고 구석진 자리를 좋아한, 에고가 뛰어놀던 세상에선 무엇 하나 내세울 수 없던 나.
아주 가끔 어딘가에서 에고가 내 행세를 하고 다니더라는 풍문이 들려왔다. 드문드문 전해지던 그런 이야기마저 뚝 끊기자 나는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본래도 혼자였지만 이제는 ‘온전히’ 혼자인 나. 에고라는 껍데기가 훌렁 벗겨져 나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나. 여전히 하느님의 모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나. 어쨌거나 하느님을 알아버렸으니 믿어야만 하는 나. 이도 저도 아닌 채 동공만 크게 벌어진 나.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시야를 가리던 그 어두움이 왜 그토록 길어야 했는지. 하느님이 언제나 함께하셨다면, 어째서 억지로라도 진작 그 장막을 찢고 빛을 주지 않으셨는지.
잠깐, 혹시....피가 맺히도록 두드려 에고 형상을 새겨갈 때 내 손을 멈춘 이가 당신이었을까?
에고의 본보기였던 대상에게 모두가 환호할 때 ‘어쩐지 섬뜩한’ 느낌을 준 이가 당신이었을까?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달려가던 나를 사고로, 병으로라도 걸려 넘어지게 한 이가 당신이었을까?
벼랑 꼭대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늘 적당한 고도에서 멈추게 한 이가 당신이었을까?
택시 기사님에게, 꽈배기 집 사장님에게, 나와 만나면 당신의 존재를 알리라 시킨 게 당신이었을까?
당신이 함께하는 방식이 그런 것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기에 이런저런 가설을 머릿속에 세워본다.
살아온 날을 조금씩 거슬러 올라가며 찾아본다. 당신이 내 곁에 있었다고 짐작되는 시기와 당신이 내 곁에 있었을 리 없다고 여겨지는 시기를 나누어본다.
내 마음은 잠시 특정한 시기에 꽂힌다. ‘만약 그때도 당신이 곁에 있었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라고까지 하고 싶은 장면들이다. ‘하느님은 없다’라는 증거로 누구에게든 내밀 수 있으리만치 비참한 파편. 고통 속에서 신이 어딨냐며 악다구니를 썼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많이 당신을 찾았던 나날.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 실컷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축축하고 끈적한 감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작은 조가비 껍질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보인다. 당신에게 토해냈던 외침에 대한 답이, 고요히 자그맣고 예쁘장하게 콕콕 박혀 있다. 버둥거리며 아빠 등에 주먹질해 대는 아이에게, 호통 대신 무지갯빛 조가비를 건네어 보여주는 마음처럼.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는다.
나라면 나 같은 인간을 눈감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면 나 같은 인간은 진작 포기했겠지.
나라면 나 같은 인간에게 아무런 재능도 주지 않았을 텐데.
나라면 나 같은 인간이 넘어졌을 때 꼴 좋다며 그냥 지나쳤을 수도.
미약하고 어설픈 데다 두터운 에고에 칭칭 감긴 나 같은 인간과 맞닥뜨려야 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저마다 다른 빛깔을 지닌 조가비가 햇살을 반사한다.
웃으며 그냥 넘겨주고, 정색하며 달려들 때 등을 토닥여주고, 어색함을 무릅쓴 채 따스한 말을 건네주고, 떨어뜨린 지갑을 허리 굽혀 주워주고, 아무 다툼 없었다는 듯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큰 실수도 다 잊었다며 눈을 찡긋해주던 이들. 딱히 위대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던, 당신의 세상에 어울리는 장면들.
다시는 못할 줄 알았는데, 더 이상 내게는 허락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포기 직전에 기막힌 우연처럼 눈 앞에 펼쳐지던 새로운 기회들.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일 뿐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는데도 다가와 주던 이들. 연이은 질병 사이사이 나타나던 탁월한 치유자들과 그 와중에도 몸을 움직일 수 있던 날들.
나는 주먹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린다. 당신 등에 가만히 업혀 당신이 만든 세상을 먼 시선으로 바라본다. 해는 이미 떠올라 바다 수면 전체에 빛을 내리쬐고 있다. 바다와 갯벌과 빼꼼히 고개를 내민 조가비가 모두 하나가 된 듯 반짝인다. 보호막이라 믿었던 겹겹의 에고도 벗고 주먹까지 풀어버린 나는 전에 없이 취약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대로가 더없이 좋다.
아주, 아주 먼 길을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