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프랑스.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고 제법 들뜨기 시작할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지난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왔던가, 하는 생각이 그 들뜬 생각들 사이로 치고 들어왔다. 사실 쳐내야 할 무자비한 과거도, 드러내야 할 장밋빛 계획도, 앞으로 뭔가 이루어내야 할 것도 내게는 없었다.
제법 호기롭게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 이라고 중얼대며 평생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다. 정말로 삶이 종이짝처럼 홱 뒤집는 순간 새롭고 하얀 면이 드러난다 생각하고 있었다. 태어날 때 내게 주어진 한 면은 이미 빽빽하고 알아볼 수 없는 낙서로 시커멓게 되어버렸다고 느낀 즈음이었다. 뭔가 손 쓸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느낌. 막막한 마음.
내 인생에는 이 한 면밖에 없다, 이걸 망쳐버렸으니 끝난 거다, 이제는 내 손으로 갖다 버리거나 누가 태워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믿던 때도 있었는데. 그나마 한번의 인생에 딱 한 면만 주어지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게 다행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나 진저리를 친 나머지 새 삶의 '새'라는 형용사가 무얼 묘사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무조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냅다 던져버리기만 했다. 내가 싫었고, 나를 둘러싼 것이 싫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특징 중 나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은 모조리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오던 '너는 …하다'의 점 세 개에 해당하는 모든 특성을 지우고 무색무취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독창성, 개성 따위의 말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런 말이 칭찬으로 날아올 때조차 엄마의 경멸어린 눈빛과 이죽거림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여튼, 잘났다. 유난한 것."
그렇기에 한국을 떠날 때에는 상당히 멀리까지 가능성을 둔 셈이었다. 진심, 국적과 이름까지 바꾸고 지금껏 이어온 모든 경력과 삶의 바탕과는 전혀 다르게 살 준비가 되어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뜨는 순간 흡사 계속 거슬리던 피딱지가 뚝,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면서도 아프고, 지금은 피가 배어나오지만 새 살이 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터였다.
모든 게 내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빨리 찾아왔다. 비행기 안에서 공항 안으로, 공항에서 전철 안으로, 전철에서 기숙사 방 안으로… 헉헉대며 빡빡한 일정을 쳐내고 만 이틀 만에 드디어 혼자만의 공간에 놓이는 상황이었다. 왼손에 캐리어, 오른손에 기숙사 서류 꾸러미를 든 채 프랑스다운 파란색으로 칠해진 작은 방문을 열었다. 정면으로 창이 나있고, 창 밑에 책상이 놓이고, 오른쪽에는 침대와 선반이 말끔히 놓여진, 기대보다 사뭇 괜찮은 방이었다. 나는 전혀 낯설지 않은 흐린 겨울 하늘을 오롯이 담은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멍해졌다. 부러 기분을 헤아리려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빠져있는 감정이 온 몸을 감싸더니 조금씩 피부 위를 압박해왔다. 느껴 봐, 느껴 봐, 하는 것처럼. 정체를 간파당하기 전인데도 이 감정은 내 심장 부근에서, 아니 정확히 마음 속에서 샘물 솟듯 퐁퐁 올라왔다. 나는 낯선 나라에, 예전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도시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만의 방에 도착해있다. 마음만 먹으면 나는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한 채 의도적인 침묵 안에 머물 수 있다. 말을 건넬 사람도 없고 나는 한동안 벙어리처럼 지내야 할 것이므로 말로만 들어온 '철저한 혼자'인 상태다. 즉, 지금 내 안에서 계속 올라오는 이것은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온전히 나로부터만 나왔다. 차갑게 언 손에 엉겨 붙어있던 무거운 가방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았을 뿐, 나는 미동도 않은 채 방에 들어선 그대로 서 있었다. 숨이라도 거칠게 쉬면 이 감정의 정체를 알지도 못한 채 흘려보낼 것 같아 그저 정지해있었다. 그리고 이내 알아챘다.
몹시 익숙했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새삼 마주하기가 어색할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혈액을 타고 흐르는, 내 몸 속 수분 안에서 색채를 우려내고 있던, 그 감정이었다.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진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무언가 시도할라치면 냅다 내 손에서 의지라는 걸 빼앗아 땅에 패대기치던 그 어두컴컴하고 찐득한 감정.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가 나를 데리고 다니는 이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내 기분과 내 상태와 내 삶은 모조리 내게서 나왔다.
머무는 장소와 주변 사람과 어떤 요소가 바뀐들 그 어떤 이유로도 내가 저절로 바뀌진 않을 것이다.
프랑스까지 나를 밀어냈던 위태로운 의욕과 긴장이 발바닥을 통해 몸을 주욱 빠져나가는 듯했다. 허무라는 단어로 그 순간을 묘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바둥대며 매달려 있던 밧줄을 놓았더니 발바닥 바로 아래 바닥이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본디 내가 다다르고 싶지 않았던, 미지의 장소에 방금 발을 내려놓은 나는 오도카니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좀 더 열심히 그 느낌을 파고 들었더라면 내 앞에는 다른 길이 펼쳐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당시 허락된 깨달음은 그 정도까지였다. 나는 다음 날 눈을 뜨지 마자 또다시 눈 앞의 당근을 열심히 쫓아가는 당나귀처럼 시간을 보냈다. 연달아 떨어지는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처치하면서 불안한 눈동자로 두리번댔다. 내 삶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도 가져와주지 못할 사소한 일들에 자신을 송두리째 갖다 바쳤다. 어떤 마음 방식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정말 빛날 수도 있는 순간들이 그저 힘겨움으로만 지나가버렸다. 가여운 나는 그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안쪽으로는 가혹한 잣대에, 바깥쪽으로는 대상도 없이 둘러입은 방어막에 짓눌리며 꾸역꾸역 낯선 땅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내게 새 삶이란 사실상 불가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