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자의 몰락

똑똑한 자의 몰락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마지막 남은 똑똑한 녀석마저 그 길 끝에서 뒤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는 소리높여 대답했지만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한없이 가파른 내리막길만 주시하고 있었다. 

"늦지 않았어!"
"이쪽으로 어서 돌아와!"
내 외침은 허탈하게 흩어지면서 녀석 뒤에 그림자처럼 깔렸다. 

터덜터덜. 위태로이 아래를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 모습 뒤로 나는 중얼거렸다.
왜, 너도, 결국.
그 순간 스산한 깨달음이 급습했다. 
이제껏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의문과 헤아리기 어려운 답답함. 
그 입자들이 하나로 뭉쳐 단단한 돌덩이처럼 머리를 강타했다. 

너는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똑똑하기 '때문에' 거기 서버렸구나.

명민한 머리와 화려한 언변을 갖추고도 서서히 아래로 떨어져 가던,
그 추락의 순간에조차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하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 갔다. 

'내가...내가 왜...?'

가만히 있기만 해도 광채를 발하던 그 존재들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는 욕구불만이 분노로, 원망으로, 무기력으로 바뀌는 여정을 고스란히 밟다가 모두 똑같은 지점에 도달했다. 
바로 이곳으로. 

"너 진짜 똑똑하구나."

살다 보면 이런 감탄을 자아내는 머리 좋은 사람을 종종 만난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의 두뇌 회전을 발휘하는 경외의 대상이다. 

고만고만한 우리끼리 끙끙대고 있던 문제에 곁눈질만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던 친구, 
앉아 있는 시간에 비해 월등한 성적을 자랑하는 같은 반 아이, 
'옜다 가져라' 하는 느낌으로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동료, 
책에서든 웹에서든 방대한 정보를 순식간에 흡수해 핵심만 뽑아내는 지인 등등. 
 '삶의 추월차선'을 타기 마땅한 이들이었다.
입출력 기능이 평범한 뇌를 가진 데다 뭘 해도 느려터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솔직히 누군들 그 사실을 부정할까? 세상은 똑똑한 자들의 무대였다. 승자독식이라지 않는가.
그나마 저들이 앞으로 있을 곳은 '딴 세상'이리라는 예감이 위안을 주었다. 그 '어나더 리그'는 여기와 다른 규칙 아래 굴러갈테니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내 '평범한'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며 나날을 보내는데 언젠가부터 묘한 낌새가 감지됐다. 

이미 출발선부터 달랐던, 진작 치고 나가 시야에서 벗어났던 이들 중 일부의 현재 좌표가 이상했다.
추월차선을 타기는커녕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심지어 평균 수준보다 훨씬 뒤에 처진 사람도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삶의 어느 길목에 이르러 마주쳐버린 우리는 서로 몹시 당황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dark pathway lit with small light fixture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았던, 당연히 그러리라 믿었던 사람이 엉뚱한 곳에 있었다.
심지어 그곳은 내 세상보다 훨씬 초라하거나 가시밭길에 가까웠다.
처음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는 예외일 뿐이라 여겼지만, 살아갈수록 점점 많은 똑똑이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무도 이상한 나머지 수수께끼 풀듯이 관찰하니 이들의 공통점이 보였다.

  1. 깜짝 놀랄만한 두뇌에 비해 학교나 직장 간판 같은 사회적 스펙이 떨어진다.
    ("걔가 거기밖에 못 갔다고? 왜?" "의외네. 천재인 줄 알았는데.")
  2. 자신이 속한 집단을 깎아내리거나 연급 자체를 피한다.
    ("원래 내 성적대로라면 갈 학교가 아닌데 시험을 망쳤어."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다니겠어.")
  3. 하는 일을 자주 바꾸는데 이상하게  다 안 풀린다.
    ("내가 이런 일에 열정을 바칠 수는 없잖아?" "그 시험 합격해 봤자 비전 없을 거 같아서 때려치웠어.")
  4. 인간 위키피디아처럼 아는 건 매우 많고 말도 청산유수다. 그러나 실생활 적용은 드물다.
    (유명 투자자의 포트폴리오를 분석적으로 맹비난하지만 본인 자산은 그 사람의 0.0001%에도 못 미친다. "내가 시작을 안 해서 그렇지, 일단 하면...")
  5. 성실한 타인의 계획이나 본업에 찬물 끼얹는 말이나 부정적인 전망만 해댄다.
    ("거기 레드오션 아닌가?" "제대로 알아보면 그런 일 못할걸.")
  6. 기본 태도가 우월감, 냉소, 회의주의, 비웃음이다. 
    ("나도 이미 생각해 봤던 거야." "그게 될 거라 생각해?")

...누구나 주변 인물 한 명 이상은 떠오를 것이다. 
이들은 오랜 친구나 가족의 일원으로 우리 옆에 있으면서, 시간이 갈수록 안타까움과 찜찜한 의문을 안겨준다. 

대체 왜 저럴까. 왜 저 좋은 머리를 썩히면서 삐딱선을 탈까.

더 끔찍한 순간은 그게 나 자신일 때다.

헛똑똑이의 탄생

똑똑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아무래도 빠른 두뇌 회전과 탁월한 학습 능력이다. 너무도 티가 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엔 흔히 신동으로 여겨지며 주위의 기대를 가득 받고 자란다. 무엇이든 조금만 배워도 평균 이상을 해내고 누구보다 빨리 배운다. 학생 때는 '공부는 진짜 전혀 하지 않았는데 시험 잘 보는' 인간형으로 지낸다. 엉덩이로 공부하거나 아무리 애써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주변인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손쉬운 성공 경험이 쌓일수록 부작용이 서서히 싹튼다는 데 있다.

노력? 그게 뭔데?

번뜩이지만 어딘가 불균형하게 성장하는 이 '헛똑똑이'들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러나 진부하지만 불변인 진리 하나만은 이들 역시 피할 수는 없다.

인간이란 본디, 스스로 궁리하고 애써서 얻지 않은 것은 소중히 여기지 않기 마련이다. 

가장 심각한 지점은 여기다.
몸과 마음의 최대 성장기인 20여 년 동안, 그 뛰어난 머리 탓에 '인생을 거저먹는' 습관이 들어버리고 만다. 본인도 딱히 힘들여서 무언가를 얻어본 적 없고,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그냥 대충 가볍게 움직여 얻은 결과만으로도 주변에서 찬탄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천재 아냐?
대단하다.
부러워.
어떻게 저게 가능해??

인생 초반, 타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은 실패 경험 역시 자아상을 한껏 높이는 연료다. 
이들에게 노력이란 자신보다 못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며, 전혀 '쿨'해보이지 않는다.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한 열등한 존재가 "나는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해야 합니다!"를 자진해 외치는 몸부림이랄까.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기 위해 꼼꼼히 계획하고 지키는 모습마저 유치해 보인다. 노오력은 루저의 전유물인 것이다.

이쯤 되면 '노력하는 자세도 능력의 일부이며 들여야 하는 습관'이라는 진실 또한 영영 멀어진다. 그런 미덕을 전혀 배우지 못한 채 나이가 들어버리고 만다.

a blurry photo of a person walking in the snow

나락의 추월차선

슬프게도 이들에게 좌절은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인생이란 참 묘하다. 가만히 있으면 현상 유지는 되겠지, 하는 바람과 달리 가만히 있으면 내리막만 타게 된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냥 난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억울함을 호소해도 소용없다. 가만히 있음은 곧 고여있다는 것이고 그대로 썩어간다는 뜻이다. 서서히 탁해지고 냄새를 풍기면서.

굳이 복잡한 이론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다.
일단 이 세상은 '똑똑하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다. 거기다 입까지 살아있으면 더 싫어한다.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분위기를 망치기 때문이다. 

현란한 말솜씨와 번뜩이는 두뇌로 각광을 받으며 면접을 통과한 똑똑이 신입사원을 아는가? 
이들의 추락 궤도가 엇비슷한 이유도 그래서다. 

이들은 입사하자마자 회사의  '바보 같고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을 누구보다 재빨리 파악한다. (똑똑하니까)
이어서 자신을 가르쳐주는 사수 선배와 상사 역시 자신만큼 영민하지 않음을 알아챈다. (역시 똑똑하다)
그러다 보니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전수해 주는 요령까지 의심하기 시작하고, 자기 식대로 해석한 업무 방식을 밀고 나간다. (삐끗하는 순간이다)
그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감히 이런 부조리투성이의 조직이 나를 단죄하냐'며 책임을 회피한다. (이쯤 오면 그 똑똑함을 주위 모두가 알게 된다)
입지가 좁아지고 도와줄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 지경에서야 사표를 던지거나(자신을 담기에는 조직의 그릇이 너무 작다고 믿으며) 잘리고 만다(부당해고로 제소하기를 즐기는 편이다). 

똑똑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닌 똑똑하기 '때문에'

상식적인 보통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한두 번 쓴맛을 볼 경우,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며 얼른 노선을 수정한다. 아니면 최소한 약간은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으려고 해본다. 그러나 똑똑이에게는 그런 일이 너무도 어렵다.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의 말발에 이기는 사람도, 번지르르한 그 (개)논리의 허점을 집어내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모종의 외로움은 느낄지언정,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 시간은 점점 흘러 나이가 들어간다. 
이제는 신입사원 적응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더 크고 중요한 문제가 메일 눈앞에 놓인다. 
여전히 똑똑한 그들은 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여지없이 실패를 겪는다. 마음속에 의아함만을 키운 채.

주변 사람을 돌아볼 때마다  ‘나보다 훨씬 못했던 인간인데 지금은 왜 나보다 잘나가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는 ‘내가 이런 보잘 곳 없는 데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가까운 인간관계를 꾸려나갈 때면 ’난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왜 이 정도밖에 해주지 않는 거야?‘ 
대답 대신 상대방과 세상은 조금씩 이들을 밀어낼 뿐이다. 한 발짝, 한 발짝, 조금씩, 벼랑 쪽으로. 

이 똑똑이들이 끝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다. 
여태껏 아무도 자신을 이기지 못했던 이유는 완벽함 덕분이 절대 아니라는 점.
다들 그 (개)논리에 맞서는 게 피곤하고 답도 없으니 슬슬 피했을 뿐이라는 점.
그 와중에 지치지 않는 자는 오로지 자신 뿐이었음을.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마지막 남은 똑똑한 녀석마저 그 길 끝에서 뒤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